세계 1차 대전 발발의 원인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한 원인은 단일한 사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여러 국가 간의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긴장 관계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전쟁 발발 계기는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Archduke Franz Ferdinand)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암살 사건 이후 사라예보에서 반세르비아 폭동을 조장하였으며, 사라예보 외곽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의 다른 도시에서도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약 5,500명의 세르비안인을 투옥하였고, 그중 상당 수가 감옥에서 사망하였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 암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대해 군사적 대응을 결정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게 굴욕적인 요구사항을 담음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의 모든 요구사항을 수용하지 않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이후 동맹체계에 따라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순차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14년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조약, 동맹, 비밀 협정을 통해 두 개의 대립적인 동맹 체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한쪽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로 구성된 삼국 동맹(Triple Alliance)이고, 다른 한쪽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로 구성된 삼국 협상(Triple Entente)입니다.
전쟁의 확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사이의 전쟁은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베오그라드에 포격을 시작하자 러시아는 7월 30일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다음 날인 7월 31일 독일 역시 러시아를 침략자로 규정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하기 위해 동원령을 내렸고, 영국은 독일과 프랑스에 벨기에의 중립을 존중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독일은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점령하였으며,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벨기에 전역의 자유 통행을 요구하였습니다. 독일은 벨기에에서의 자유 통행 요구가 거부되자 8월 4일 벨기에를 공격하였고, 벨기에의 알베르 1세는 런던 조약에 따라 영국에 지원 요청을 하였습니다. 영국은 독일에게 벨기에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독일이 응답하지 않자 마침내 그날 자정을 맞아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유럽은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의 주요국들이 모두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전선은 유럽 외 지역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토고란드와 카메룬을 포함한 아프리카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은 중국 산동 반도의 칭다오의 독일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됩니다. 또한 일본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칭다오에 주둔하고 있던 순양함 철수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도 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영국과 독일은 인도에서도 식민지를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미국은 전쟁 참여에 대한 부정적인 국내 여론에 따라 1914년까지는 중립을 유지하였지만, 연합국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주요 공급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인해 미국인이 사망하고 선박들의 통행에 제한을 받자, 1917년 4월 6일 마침내 연합군의 연합국(Associated Power)으로서 독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전장의 무대는 전 세계로 확대되었으며, 세계 대전으로 불리우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세계 1차 대전은 단일한 사건의 결과가 아닌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 전쟁은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국제 질서, 국가의 경제, 사회 구조에 많은 영향과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전쟁의 결말과 후속적인 여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