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자와 전쟁 범죄(Casualties and war crimes)
세계 2차 대전은 전쟁에 참가한 국가만큼이나 엄청난 인명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총 사상자 수에 대한 추정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약 2천만 명의 군인과 4천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6천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소련은 사망자가 가장 많은 국가로 꼽히는 데, 군인 870만 명, 민간인 1,900만 명을 포함하여 약 2,700만 명이 사망했으며, 독일은 소련과 접한 동부 전선 및 독일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530만 명의 군인이 사망했습니다.
히틀러의 인종 차별 정책으로 인한 사망자는 약 1,100만 명에서 1,70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약 600만 명의 유대인, 로마인, 동성애자, 최소 190만 명의 폴란드인, 그리고 수백만 명의 여타 슬라브족(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포함) 및 소수 민족이 포함됩니다.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사망자 수는 민간인 1천만-2천만 명, 중국군 사상자(사망 및 부상)는 5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은 난징 대학살(Nanjing Massacre)로 불리는 가장 악명 높은 잔학 행위를 저질렀는 데, 약 50-30만 명의 중국인이 강간되고 살해된 것으로 보입니다.
추축국은 생화학 무기(biological and chemical weapons)를 전쟁에 사용했는 데, 일본군은 치명적인 인간 실험과 생물학 무기 제조로 악명 높은 731 부대를 중심으로 중국 및 소련과의 전쟁 초기 동안 다양한 생화학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독일과 일본 모두 민간인을 대상으로 때로는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이러한 무기를 실험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소련군은 점령지, 특히 독일에서 대규모 강간을 저질렀는데, 전쟁과 점령 기간 동안 소련군에 강간당한 독일 여성은 최대 2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더하여, 소련에서 독일군에 의해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천만 명에 이릅니다.
일본 본토에서는 총 67개의 도시가 공중 폭격을 당했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민간인을 포함하여 393,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량 학살과 강제 수용소 수용(Genocide, concentration camp, and slave labour)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를 통해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살아갈 가치가 없는(unworthy of life)" 인종에 대한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400만 명(장애인, 정신 질환자, 소련 전쟁 포로, 로마인,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포함)을 추가로 살해했습니다.
독일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소련군은 특히 견디기 어려운 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570만 명의 소련 포로 중 360만 명이 나치 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강제 수용소 외 독일은 죽음의 수용소를 운영했는데, 이곳에서는 독일이 점령한 국가에서 1,200만 명의 유럽인이 납치되어 독일 산업, 농업 및 전쟁 산업 부문에서 노예에 가까운 노동력으로 사용했습니다.
일본군 포로 수용소는 대부분이 노동 수용소로서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 따르면, 일본에 포로로 잡힌 서구 포로의 사망률이 27% (미국 포로의 경우 37%)로 독일군 및 이탈리아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 보다 7배나 높았습니다.
1935년에서 1941년 사이에 중국 북부와 만주국에서 최소 500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광산 및 군수 산업에 종사하기 위해 일본이 설립한 동아시아 개발 위원회에 의해 노예가 되었습니다. 1942년 이후에는 그 수가 1,000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자바에서는 400만에서 1,000만 명 사이의 로무샤(일본어로 육체 노동자)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노동을 했습니다.
경제 및 산업의 약탈
독일의 유럽 점령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독일은 유럽의 서부, 북부 및 중부 지역에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695억 라이히스마르크(278억 달러)를 강제 징수했으며, 여기에는 산업 제품, 군사 장비, 원자재 및 기타 상품의 약탈을 포함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일이 점령국에서 거둬 들인 수입은 독일 세금 수입의 40%를 넘었고, 나중에 이 수입은 독일 전체 소득의 40%까지 증가했습니다.
유럽 동부 지역에서는 소련의 초토화 정책과 독일의 침략에 대한 거부감으로 자원 획득이 여의치 않았으며, 대신 인종 차별 정책에 따라 "열등한 민족"으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대규모 잔혹 행위와 전쟁 범죄가 저질러 졌습니다. 나치는 전쟁 중에 홀로코스트의 폴란드계 유대인 희생자들 외에도 약 277만 명의 폴란드인을 살해했습니다.
일본 역시 자신이 점령한 국가들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 아래 본질적으로는 식민지화하였으며, 그들의 잔혹한 전쟁 범죄는 지역으로부터 커다란 저항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전쟁 초기 연합군이 후퇴하면서 남겨둔 4,000,000 배럴의 석유를 포획했으며, 또한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점유하여 1943년까지 약 5천만 배럴의 석유를 획득하였습니다.
군수 물자와 생산 능력
1930년대 영국과 미국은 세계 광물 생산량의 75%를 통제하였으며, 이는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했습니다. 또한 전쟁 전 연합군은 유럽에서 인구와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우위를 보였는데, 연합군의 인구는 추축국 대비 인구가 30% 많았고 국내총생산(GDP)도 30% 더 높았습니다. 식민지를 포함할 경우, 연합군은 추축국 대비 인구 면에서 5:1 이상, GDP 면에서는 거의 2:1 정도의 우위를 보였습니다.
미국은 군함, 수송선, 전투기, 보병, 탱크, 트럭, 탄약을 포함하여 세계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사용한 전체 군수품의 약 3분의 2를 생산했습니다. 연합군의 이러한 경제적, 인구적 이점은 독일과 일본의 전쟁 초기 전격적인 공격으로 크게 줄어들었지만, 미국과 소련이 연합군에 합류하고 전쟁이 극심한 소모전의 형태를 띠게 된 1942년부터는 결정적인 승리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추축국을 능가하는 연합군의 능력은 부분적으로 천연 자원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는데, 반면에 독일과 일본은 여성 인력의 사용을 주저했으며 독일의 전쟁 경제로의 전환이 늦은 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더하여 전쟁 계획 상 독일과 일본은 인구와 자원이 무한정 투하되는 장기전을 준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군수 물자에 대한 생산 능력이 뒤떨어지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독일과 일본은 이를 수백만 명의 노예 노동자로 대처하려고 했습니다. 독일은 주로 동유럽 출신의 노예 노동자 1,200만 명을 이용하였고, 일본은 극동 아시아에서 1,8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노예로 이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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