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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사 인물 및 역사

세계 1차 대전 (2) : 전쟁 발발 전 유럽의 환경

by MYJets 2024. 3. 25.

지난 글에서는 1차 대전의 전체적인 개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1차 대전이 발발하게 된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열강 간의 정치적, 군사적 동맹(Political and military alliances)

 

19세기 유럽은 '유럽의 콘서트(Concert of Europe)로 알려진 주요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이 유지되던 시기입니다. 1848년 이후 이러한 열강 간 균형은 영국의 화려한 독자 노선(splendid isolation) 추구,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의 쇠퇴,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 그리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는 프로이센(Prussia)의 출현으로 도전을 받게 됩니다.

 

 

세계 1차 대전 군사동맹
세계 1차 대전 군사동맹

 

 

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Austro-Prussian) 전쟁 그리고 1870-18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Franco-Prussian) 전쟁의 승리로 인해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이 지배하는 독일 제국을 통합하게 됩니다. 이후 프랑스는 몇 년 동안 독일에 대한 복수 및 알자스-로레인(Alsace-Lorraine) 지방의 회복에 전념하였으나, 1880년대 들어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복수는 잊고 방대한 식민지 정복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전쟁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독일 간 3제 동맹(League of the Three Emperors)을 맺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1877-1878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자, 그들의 전략적 요충지인 발칸 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3제 동맹에서 탈퇴하게 됩니다.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중 동맹을 거쳐, 1982년 이탈리아를 합류시켜 삼중 동맹(Triple Alliance)을 체결합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삼중 동맹을 체결한 목적은 3국 간의 분쟁은 동맹 내에서 자체 해결하되,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1880년 영국-프랑스-러시아 간 직접 협상이 진전 됨에 따라, 삼중 동맹은 수 차례에 걸친 갱신을 거쳐 1887년 만료됩니다. 하지만 독일은 러시아와 비밀 협정을 체결하고, 독일과 러시아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중립을 유지하기로 합니다.

 

독일을 이끌었던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와의 평화 유지를 독일의 최우선 정책으로 표방했지만, 1890년 카이저(Kaiser)에 취임한 빌헬름 2세(Wilhelm II)는 비스마르크를 퇴임시켰으며 러시아와의 비밀 조약도 폐기하였습니다. 독일의 이러한 조치는 1894년 프랑스-러시아 동맹 그리고 1904년 프랑스-영국 동맹 및 1907년 영국-러시아 동맹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삼국 협상(Triple Entente)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삼국 협상은 공식적인 동맹은 아니었지만, 영국이 프랑스나 러시아가 관련된 미래 분쟁에 개입할 명분이 되었으며, 1911년 아가디르 위기(Agardir Crisis)가 발생했을 때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에 대응하여 프랑스를 지원하였고 결과적으로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한 관계로 남게 됩니다.

 

 

열강 간의 군비 경쟁(arm race)

 

독일은 1871년 통일 독일 제국을 창설과 함께 프랑스의 배상금 지불 및 알사스-로레인 지방의 합병으로 인해 산업과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이끌 당시, 그는 영국이 해양 패권을 보장받는 한 유럽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카이저에 취임한 빌헬름 2세는 1890년 비스마르크를 해임하였고, 영국 왕립 해군(British Royal Navy)과 경쟁하기 위해 독일 제국 해군(Imperial German Navy)을 창설하였으며 이로 인해 영국과 독일 간 해군 군비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1906년 영국의 HMS 드레드노트(Dreadnought)를 진수하여 기술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1911년 독일은 패배를 인정하고 군비 지출을 육군으로 전환하였습니다. 독일의 이러한 결정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혼돈으로부터 빠르게 회복한 러시아가 독일과의 국경에서 철도 및 교통 기반 시설을 크게 확장한 때문입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로서는 영국 해군과의 군비 경쟁보다 러시아에 비해 수적 열세를 만회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1913년 독일이 상비군을 17만 명으로 확대하자 프랑스는 군대의 의무 복무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였고, 발칸 반도 인근의 이탈리아 및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군비 지출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러한 추세로 인해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유럽 6대 강국의 군비 지출은 최소 50% 이상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발칸 반도의 갈등(Conflict in the Balkans)

 

오스트리아는 발칸 반도를 제국의 존속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고, 세르비아의 확장을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1878년부터 점유했던 옛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였는데, 이는 다른 유럽 열강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발칸 반도를 두고 대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세르비아 및 이탈리아와도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1911 - 1912년의 이탈리아-터키 전쟁 이후,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그리스는 발칸 연맹(Balkan League)을 결성하였으며, 이 연맹은 1912 -1913년 제1차 발칸 전쟁(First Balkan War) 동안 발칸 반도에 있는 오스만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습니다. 또한 세르비아가 아드리아 해의 항구를 점령하자, 오스트리아는 군대를 동원하였지만, 러시아는 준비 부족으로 이를 묵인하게 됩니다.

 

1913년 강대국들은 런던 조약을 통해 발칸 연맹이 차지한 영토에 대한 통제권를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승전국 사이의 이견으로 인해 제2차 발칸 전쟁(Second Balkan War)이 일어났으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이 전쟁에서 패했고, 그 결과 마케도니아를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남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넘겨주게 됩니다. 이러한 인접국 간의 갈등, 민족주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해 1914년 이전의 발칸 반도는 유럽의 화약고(powder keg of Europe)라고 불리게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세계 1차 대전 발발의 원인이 된 사건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